작성일
2014.07.30
수정일
2014.07.30
작성자
박귀훈
조회수
569

오례리 명칭 소개

오례리

  부북면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화악산 지맥인 고안산 능선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려 시루본 줄기에 둘러 쌓이 곳으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며, 마을 앞으로 지방도 1017호선이 지나고 있음.


마을소개
유물, 유적
  • 의첨재(依瞻齋)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30호 의첨재(依瞻齋)는 부북면 오례리에 있는 함평(咸平) 이씨(李氏) 제숙소(齊宿所)이다. 광해군때 무과(武科)에 올라 호군(護軍)을 지낸 이선지(李先智)가 어머니의 묘소 아래에 의막(依幕)을 짓고 살던 집이 였는데 집터만 남아 전해오던 것을 후손들이 숙종 년간(1674-1720)에 제살(齊室)로서 중창하였다. 그후 수차례에 걸쳐 건물을 수축해 오다가 고종 34년(1897년)에 종손인 이만헌 (李萬憲)이 종중의 의견을 모아 현재와 같이 중수(重修)하였다. 정당(正堂)은 높은 축대위에 건립된 5칸의 맞배지붕으로 가운데 2칸의 마루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방을 설치하였는데 왼편에 1칸, 오른편에 2칸이다. 정당의 맞은편 입구에 대문채가 있는바 좌우에 행랑방(行廊房)과 부엌이 각각 붙어 있고 가운데에 우뚝한 솟을대문이 설치되어 3문(三門)의 형식을 갖춘 고자사(庫子舍) 겸용의 건물 이다. 정당의 뒷편에는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는데 본래 이선지가 살던 8칸 정침의 집터로 전해오며, 최근 주춧돌이 발견되기도 했다. 정당에는 안동인(安東人) 김녕한(金寗漢)이 지은 "의첨재기(依瞻齋記)"가 붙어 있다.

버스시간표

제대로 가는 버스는 따로 없으며 제대 마을은 창녕 또는 사포방향의 길목으로써 사포방향의 마을버스 또는 창녕방향의 시외버스를 타고 갈 수 도 있다. 마을버스는 및 창녕가는 버스는 각 1시간 마다 있다.


지명유래


찾아오시는 길

시내에서 오시면 면소재지인 운전리를 지나 자가용으로는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특산물
느타리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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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례리(五禮里)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오정부곡(烏丁部曲)으로, 뒤에 오례리(烏禮里)가 되었다. 화악산(華嶽山) 지맥(支脈)인 고암산(高岩山) 능선(稜線)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려 시루봉(증산(甑山))줄기에 둘러 싸인 곳이다.

 

임진란 후에 호군(護軍) 이선지(李先智)가 모부인(母夫人) 장씨(蔣氏)를 따라 외향(外鄕)인 부북지동(府北池洞)(현(現) 제대리(堤大里))에 이거(移居)하여 살았으나 1611년(광해(光海) 3년)에 이곳 오례리(烏禮里)로 전거(奠居)하였다. 그의 충효(忠孝)와 예의(禮儀) 범절(凡節)이 출중(出衆)하여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므로 그 뒤 오례(烏禮)를 오례(五禮)로 개칭(改稱)하였다고 전해 온다. 오례(五禮)는 모든 예(禮)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월례(月禮)라고도 한다는데 그 까닭은 미상이다.

 

오례리에 속하는 자연 부락은 고암산 기슭에 새각단이라고 불리는 3,4戶가 사는 땀이 있고, 북쪽 삼시랑산을 중심으로 띄엄띄엄 5, 6호가 산재해 있을 뿐이다.

 

○ 자라산(오산-鼇山)

운전리(雲田里)에서 오례(五禮)로 들어가는 입구(入口)에 있는 산인데, 산의 형상(形象)이 자라가 엎드려 있는 모양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왜정시(倭政時) 수리(水利) 시설(施設) 시공(施工) 중(中)에 산을 끊어 지금은 자라의 몸둥이만 남아 있고 자라목은 잘려져 있다.

 

○ 삼시랑산(三豺狼山)

마을 동북쪽의 뒷산인데, 산형(山形)이 세 마리의 승냥이와 늑대가 버티고 서 있는 형국(形局)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아망골(阿望谷)

삼시랑산 뒷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옛날 밀양 지방에 암행(暗行)을 하기 위하여 어사(御使)가 그 휘하(麾下)들을 은밀(隱密)히 지휘(指揮)하던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약수(藥水)터

불당골 남쪽에 있는데, 오랜 옛날부터 효험(效驗)을 보는 물이 나는 샘으로, 한 때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오는 사람은 거의 없고, 바위 틈에서 물은 여전히 흘러 나오고 있다.

 

○ 듬바위(가암산-加岩山)

시루봉 서쪽 산 아랫쪽 골짜기에 있는 바위이다. 왜 듬바위라는 이름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듬바위 아래 호랑이 굴이 있어 왜정 초기까지 호랑이가 이 굴에 출몰(出沒)하였다고 한다.

 

○ 조롱산(조룡산- 照龍山)

마을 서편 산인데 산 형상이 조롱박 같이 생겼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옛날 성지(聖智)가 구산(求山)을 하다가 이곳이 명산(名山)이라 하여 묘(墓)터를 잡았다고 전해 오고 있다.

 

○ 성지골(성지곡-聖智谷)

딱밭골 서편에 있는 골짜기인데, 옛날 성지(聖智)가 묘(墓) 터를 보러 다녀갔다고 하여 성지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성지가 한 번만 지나가도 새로 지명(地名)이 생길 정도로 그의 위세(威勢)가 대단하였던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 덩글 바위

오례리 서편 산 위에 있는 바위이다. 마을에서 내다보면 바위가 유난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의 눈에 덩그렇게 툭 튀어나 보였기에 덩그런 바위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장군소(장군정-將軍井)

오례리 마을 서쪽에 있는 샘 이름인데, 물을 마시면 힘이 세어졌다고 한다.그래서 오례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이 물을 마셨는데, 그때는 온 고을에서도 오례리 사람들의 완력(腕力)을 당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더러는 힘을 믿고 저질러지는 부당한 장난도 있고 해서 은근히 걱정하는 말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마침 어느날 노승(老僧)이 나타나 이 소(沼)의 수맥(水脈)을 잘랐다고 한다. 그로부터는 장군소의 물도 효험이 없어졌다고 전해 온다. 지금도 장군소의 흔적은 남아 있다.

 

○ 고동바위

의담재(依膽齋) 앞 논에 박혀 있는데 고동(패류(貝類))과 관계가 깊은 학류(鶴類)의 새들이 날아든다고 전해지고 있다.

 

○ 윗숲

마을 앞 서쪽에 있는 숲이다. 옛날 풍수설(風水說)에 오례리(五禮里)는 건조(乾燥)하고 화기(火氣)가 서린다도 하여 항상 염려하였는데, 이 기운(氣運)을 막을 수 있는 주술(呪術)로 마을 아래와 위에 숲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숲이 조성되고 난 뒤로는 동쪽으로 화기(火氣)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하며, 이 들 아래 위 숲이 동네 앞을 가리었다고 한다. 지금은 윗숲은 새마을 사업으로 없어져 버렸으며, 아래 숲도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수령(樹齡) 약 오백년 되는 느티나무 한 그루는 죽고, 지금 신당(神堂)으로 쓰고 있는 한 그루만 남아 오랜 옛날부터 숲이 있었던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 오례제(五禮堤)

옛날 제방이 있었는데 이조 시대에 폐지되었다고 한다.

 

○ 사직단지(社稷壇址)

원래 남산(南山) 밑에 었었는데 1580년 경 부사(府使) 하진보(河晉寶)가 오례 마을 남쪽으로 옮긴 것이다. 사직단(社稷壇)은 중앙(中央)(서울)과 각 고을에서 토지신(土地神)과 곡신(穀神)을 제사(祭祀) 지내는 곳이다. 단(壇)은 2층으로 축조(築造)하고 그 위에 오색(五色)의 흙으로 덮은 것이다. 성황사(城隍祠)와 함께 매년 관부(官府)에서 제사(祭祀)를 지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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